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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포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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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하일 포킨은 18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다. 1898년 황실 무용 학교를 졸업하고 마린스키 극장에서 데뷔한 그는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안무한 '백조의 죽음'으로 명성을 얻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결성에 참여하여 '레 실피드', '불새', '페트루슈카' 등 걸작을 안무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포킨 발레'를 결성하고 미국에 귀화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전통 발레의 인위적인 기술에서 벗어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으며, 70개 이상의 작품을 안무하며 발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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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포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포킨, 1914년
본명미하일 미하일로비치 포킨
출생일1880년 4월 23일
출생지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제국
사망일1942년 8월 22일
사망지뉴욕 시, 미국
직업발레 무용가, 안무가
국적러시아, 귀화 미국
배우자베라 포키나

2. 생애

188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98년 황실 무용 학교를 졸업하고 마린스키 극장과 계약했다. 1905년부터 안무가이자 교사로 활동했으며, 1907년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안무한 「백조의 죽음」은 특히 유명하다.[6]

1909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결성에 참여하여 『레 실피드』, 『폴로베츠인의 춤』, 『세헤라자데』, 『불새』, 『장미의 정령』, 『페트루슈카』 등 발레 뤼스 초기의 걸작들을 안무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12년 『다프니스와 클로에』 초연 시 상영 시간과 순서 문제로 디아길레프와 갈등을 빚었고, 같은 해 발표된 바슬라프 니진스키 안무의 『목신의 오후』 스캔들에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발레 뤼스를 탈퇴했다. 1913년부터 1914년까지[6] 일시적으로 복귀하여 『나비』, 『황금 수탉』 등을 안무했지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6]

이후 러시아와 북유럽에서 발레 교사 및 무용수로 활동하다 1920년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정착했다. 1922년 '포킨 발레'를 결성했고, 1932년 미국 시민권을 얻어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안무 활동도 계속했다. 생애 동안 70개 이상의 작품을 안무했으며, 그의 작품 중 일부는 현재도 세계 최고 수준의 발레단에서 공연되고 있다.

2. 1. 초기 생애

포킨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부유한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9세에 황실 발레 학교에 입학했고, 같은 해 마리우스 프티파의 지도 아래 ''탈리스만''으로 데뷔했다. 1898년, 18세 생일에 황실 마린스키 극장에서 황실 러시아 발레단과 함께 ''파키타''로 데뷔했다.[1] 포킨은 재능 있는 무용수였을 뿐만 아니라 회화에도 열정을 보였고, 이 분야에서도 재능을 나타냈다. 그는 만돌린(지니슬라오 파리스 앙상블), 돔라, 발랄라이카(바실리 안드레예프의 그레이트 러시아 오케스트라) 등의 악기도 연주했다.[1]

2. 2. 안무가로서의 전환

그는 무용수로서의 삶에 좌절감을 느끼고 그림을 포함한 다른 길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02년, 그는 안무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는 제정 러시아 발레 학교의 교사직을 제안받았다. 1905년, 그는 학생들에 의해 공연된 시칠리아 전설을 바탕으로 한 첫 번째 장편 발레인 《아키스와 갈라테아》(Acis et Galatée)를 만들었다. 그의 학생들 중에는 데샤 델테일과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가 있었다.

포킨의 초기 작품으로는 발레 《아키스와 갈라테아》(1905)와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카미유 생상스의 음악인 《백조》에 맞춰 안무된 솔로 댄스인 《죽어가는 백조》(1907)가 있다. 《아키스와 갈라테아》에는 파우누스를 연기하는 어린 소년들의 곡예 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슬라프 니진스키였다. 포킨은 나중에 《쇼피니아나》(1907)를 포함한 발레에 니진스키를 출연시켰는데, 이 작품은 1909년 레 실피드프랑스어로 개명되었다.[6]

2. 3. 발레 뤼스와의 협업

1909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미하일 포킨을 파리에서 열린 첫 번째 발레 뤼스(Ballets Russes) 시즌의 상주 안무가로 초빙했다. 포킨은 발레 뤼스에서 다른 예술가들과 협력하여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발레 ''셰헤라자데''를 제작했으며, 1910년에 초연되었다. 이 발레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작곡한 교향시천일야화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았다. 무대 디자인은 레옹 박스트가 맡았으며, 성적인 안무와 조화를 이루었다. 역사적 정확성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발레는 화려한 색상, 이국적임, 그리고 성적인 뉘앙스로 인해 성공을 거두었다.[2] 1910년 공연에서는 니진스키가 황금 노예 역을 맡았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사용한 ''불새''(1910년) 또한 "위원회"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이는 음악, 드라마, 볼거리, 무용과 같은 요소를 종합하여 더욱 응집력 있는 예술 작품을 창조하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총체적 예술 작품''(Gesamtkunstwerk) 개념에서 영감을 받은 과정이었다. 스트라빈스키가 음악을 작곡하고 알렉상드르 베누아가 무대 디자인을 맡은 ''페트루슈카''(1912년)는 전통적으로 사육제 주간(마슬레니차) 박람회에 등장하는 러시아 인형에서 영감을 받았다. 이 발레에서 포킨은 거리 무용수, 행상인, 유모, 춤추는 곰, 그리고 줄거리를 보완하는 대규모 앙상블 캐릭터들을 포함시켰다. 이야기는 사악한 마법사 (엔리코 체케티)와 그의 세 인형, 즉 페트루슈카 (니진스키), 발레리나 (타마라 카르사비나) 그리고 사나운 무어인 (알렉산더 오를로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포킨의 발레 ''장미의 정령''(1911년)은 어린 소녀에게 주어진 장미의 정령으로 니진스키를 선보였다. 니진스키의 퇴장은 어린 소녀의 침실 창문 밖으로의 그랑 제테를 특징으로 하며, 관객들이 그를 공중에 매달린 채 마지막으로 보게 되도록 연출되었다. 1912년, 포킨은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각색하여 만들었다.

1912년 포킨은 발레 뤼스를 떠났으나, 1914년 디아길레프의 설득으로 발레 뤼스에 복귀하여 발레 ''미다스'', ''요셉 전설'', ''황금 수탉''을 제작했다.[3] 1914년 발레 뤼스에 의해 파리에서 초연된 ''황금 수탉''은 오페라 발레였으며, 포킨이 연출하고 나탈리아 곤차로바가 무대 디자인을 맡았다.

1909년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 결성에 참여한 포킨은 『레 실피드』, 『폴로베츠인의 춤』(1909년), 『세헤라자데』, 『불새』(1910년), 『장미의 정령』, 『페트루슈카』(1911년)와 같은 발레 뤼스 초기의 걸작들을 안무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12년 『다프니스와 클로에』 초연 시 상영 시간과 순서를 놓고 디아길레프와 결별했고, 같은 해 발표된 바슬라프 니진스키 안무의 『목신의 오후』 스캔들에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포킨은 1912년 발레 뤼스를 탈퇴했다. 이후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를 해고하면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13년부터 1914년까지[6] 일시적으로 발레 뤼스에 복귀하여 『나비』, 『황금 수탉』 등을 안무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2. 4. 미국에서의 활동과 말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순회 공연이 중단되자, 포킨은 많은 무용수들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갔다. 1918년 가족과 함께 스웨덴으로 이주했고, 이후 뉴욕 시에 정착하여 1921년 발레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부인 베라 포키나와 함께 공연을 계속했으며, 패트리샤 보우먼 등의 제자를 양성했다. 1924년에는 아메리칸 발레 컴퍼니를 조직하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에서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미국 전역을 순회했다. 이 컴퍼니를 위한 그의 첫 작품은 자크 오펜바흐의 곡에 맞춰 제작된 코미디 ''푸른 수염''이었다.[6]

1940년 1월 11일, 그의 발레 레 실피드프랑스어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1937년, 포킨은 바실 드 바질의 발레 뤼스 분파에 합류했으며, 이 단체는 결국 오리지널 발레 뤼스로 명명되었다. 이 시기에 포킨이 창작한 새로운 작품으로는 ''신데렐라''(1938년)와 ''파가니니''(1939년)가 있다. 그의 안무는 1941년까지 이 컴퍼니에서 선보여졌다.[6]

1932년 미국에 귀화한 포킨은 교사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안무 활동도 계속했다.[6]

3. 포킨의 안무 철학과 스타일

미하일 포킨은 전통적인 발레를 넘어 인간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방식을 추구했다. 그는 발레의 기교적인 기술이 어떤 것을 상징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감정과 주제를 더 잘 표현하는 형태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포킨은 춤의 소통 능력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전통을 깨는 창의성을 추구했다. 그는 전통이 종종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며 인간 감정의 전체 스펙트럼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는 동작이 표현적이지 않다면 비합리적이며 즐겁지도 용납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4]

포킨은 또한 발레에서 인위적인 기술과 시대에 뒤떨어진 의상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는 당시 많은 발레 작품들이 발레의 주제를 반영하지 않는 의상과 기술을 사용한다고 믿었다. 포킨은 그리스와 이집트 미술, 특히 항아리 그림과 조각을 연구하여 이를 자신의 발레에 통합했다. 안무가로서 그는 포인테가 "예술적 목적"을 수행하지 않을 때 발레리나의 토슈즈를 벗겼다. 그는 ''포인테''가 춤추는 몸이 솟아오르고 위로 향하는 주제를 표현하고자 할 때 사용되어야 하며, 댄서의 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는 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정 러시아 마린스키 극장의 경영진에게 제시했지만, 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포킨의 요청 중 하나는 1907년 발레 ''에우니케''에서 무용수들이 맨발로 공연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요청은 거절되었고, 포킨은 무용수들의 타이츠에 발가락을 그려 넣어 맨발처럼 보이게 했다.

그는 또한 움직임의 강조점을 하체에서 신체 전체로 옮기는 실험을 했으며, 팔과 몸통을 더 자유롭게 사용하고 각 근육을 명확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했다.[4] 그렇게 함으로써 포킨은 동작과 감정, 몸과 영혼을 통합하여 발레에 언어이자 예술로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했다.

1923년, 그는 아잔타 동굴 방문에서 영감을 받은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발레 ''아잔타 프레스코''를 안무했다.[5]

4. 주요 작품


  • 니진스키 (허버트 로스 감독, 제레미 아이언스 연기, 1980)
  • 안나 파블로바 (에밀 로테아누 감독, 세르게이 샤쿠로프 연기, 1983)
  • 존 메이스필드, <발레에 바치는 찬사>, 미하일 포킨에게 헌정하는 서시 (1938)

참조

[1] 서적 Fokine: Memoirs of a Ballet Master Little, Brown and Company
[2] 서적 Ballet and Modern Dance Thames and Hudson
[3] 서적 Diaghilev http://www.michelfok[...] Weidenfeld & Nicolson
[4] 서적 Dance as a Theatre Art Princeton Book Company
[5] 뉴스 The Pavlova Project: A unique exhibition presents the life and work of legendary ballerina through her costumes https://www.firstpos[...] Firstpost 2021-03-21
[6]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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